[광복 76주년, 골목의 역사를 만나다]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

이슈&피플 입력 2021-11-14 09:00:00 수정 2021-12-24 17:13:09 박진관 기자 0개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실물경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해 온 서울경제TV는 2021년 광복 제76주년을 맞이해서, 마치 우리 주변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가볍게 지나쳐 온 역사적 유적과 유물에 대해 ‘아카이브 기획 취재’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흔적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성과들이 험난했던 그때를 살았던 선조들의 의지와 극복 과정이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음을,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이번 기획 취재는 임진왜란과 구한말 혼란기,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반드시 영광스럽지만은 않은 유적과 유물일지라도 역사적 고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 간직되어 온 아픈 흔적들조차 끌어내고 보존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려 합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족보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더 소중히 느껴질 때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게 되고, ‘아픔’이 담긴 유물이라는 이유로 관리가 소홀해진다면 자칫 그 과오는 반복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도, 연해주, 사할린으로 쫓기듯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징병과 위안의 이름으로 꽃다운 청춘을 버려야 했던 아들과 딸들, 삭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나라와 가족을 꿋꿋이 지켜내 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흔적들, 그리고 이역만리 100년의 시간을 돌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에 다시 둥지를 튼 골목의 고려인 식당들 모두가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 할 아픔과 영광의 역사들입니다. <편집자주>


사상과 생존을 저울에 올려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비운의 시대. 문화와 예술도 예외없이 냉혹한 기로에 서야만 했다. 짧은 인생을 뜨겁게 살았던 조선의 한 천재음악가와, 혼란으로 가득찼던 시절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의 가슴 따듯했던 행보. 그 기록들을 서울의 어느 골목에서 뒤적여 본다.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한 홍난파, 본명이 홍영후인 그는 두 살 때 서울 정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살았던 집이 바로 이곳. 아담한 서양식 구옥이다.
 


홍난파의 아버지 홍준이는 선교사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원래 국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직접 거문고를 연주할 정도였고 슬하의 두 아들인 석후와 영후에게는 금파와 난파라는 별호를 지어줄 정도로 학예에 조예가 깊은 위인이었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수많은 국민 동요를 남긴 천재 음악가 홍난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당시 상당수 음악가들이 그러했듯이 어릴 적부터 교회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홍난파는 지금의 고등학생 무렵 우리 나라 최초의 고등 민간음악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했으며, 김인식 선생에게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서양악부 교사로도 활동했었다. 도쿄의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해 국내와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던 홍난파는 대한민국 첫 번째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하기도 했다.


명실상부 당대 조선의 대표 음악가로 손꼽혔던 독보적인 재능.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단 창시자이자 기악곡 작곡가인 홍난파의 작품들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대중 속에 스며들어 있다.


홍난파는 창가 수준에 머물러 있던 조선의 음악을 서양음악의 특성이 가미된 1920년대 가곡의 형태로 발전시킨, 어떻게 보면 한국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기 시작한다. 예술인으로서의 선구자적인 업적을 인정받고는 있지만 일부 황군을 위문하거나 중일전쟁 무렵 전선에 대한 후방기지라는 뜻의 ‘총후’를 만들기 위한 음악적 활동에도 적극 나서는 등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역사적 인물들처럼 친일행각에 대한 많은 비판도 따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은 조선에 대해, 일제에 대해 어떤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런던 데일리뉴스 특파원으로 내한한 어니스트 베델은 러일전쟁 발발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04년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다. 그리고 일본의 사전 검열을 피해 을사늑약 무효 등 항일 언론 활동도 전개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창간되었고, 나중에는 국한문판도 발행하게 되는데 당시 발행 부수가 1만2천부가 넘을 정도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그도 그럴것이 주필에는 박은식 선생, 필진으로는 단재 신채호 선생, 최익, 장달선, 황희성처럼 민족주의자이면서 역사의식이 뚜렷한 인사들이 논설진에 참여하면서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의의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조선의 땅에서 누구도 자유로운 비평을 전개할 수 없었던 구한말 시대. 작고 먼 나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걸고 항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노란 머리의 외국인은 어니스트 베델뿐만이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을 전 세계에 가장 먼저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가족이 살던 딜쿠샤.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딜쿠샤' 박상철 화백作

 

이외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외국인으로는 3.1운동으로 촉발된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의 현장을 가장 먼저 촬영해서 당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인 ‘상하이 가제트’에 게재함으로써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윤봉길 의거로 인해 일본 경찰에 쫓기던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자택에 숨겨주고 위치가 노출되자 중국인으로 위장시켜서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도움을 준 조지 애쉬모어 피치 등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지지해 준 숨겨진 외국인들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서울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어디엔가 아직도 남아있을, 역사의 낭떠러지에 서 있던 우리를 지지해주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었던 외국인 친구들의 희생.


그러나 이 중에는 불과 몇 십년 전에야 비로소 이런 역사적인 사실이 밝혀질 정도로 고증 자료가 충분치 않을 뿐 아니라, 충분한 예산배정과 심도 있는 연구노력 또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아쉬움이 크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도움말 : 권기봉 작가,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이훈 이야기경영연구소 대표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서울경제TV(www.sentv.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0/250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