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국도 이야기] 전쟁 중에도 지킨 고향 ‘삼척’

이슈&피플 입력 2022-09-22 17:15:03 수정 2022-09-22 18:17:57 박진관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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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역사를 만나다, 총성이 들려와도 떠날 수 없었던 고향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온 서울경제TV는 지난해에 이어, 우리가 가볍게 지나쳐 온 역사 유적과 유물에 대한 아카이브 기획 취재 '골목의 역사를 만나다'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아픈 흔적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성과들이 험난한 시대를 지나온 선조들의 의지와 극복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 역사임을,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한 이번 기획취재물 '7번 국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6.25 전쟁'을 주제로, 흔히 관광지로만 알고 있는 동해안 7번 국도의 잊혀 가고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70년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전쟁의 아픈 흔적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의 증거로써 보존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려 합니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꽃다운 청춘의 시대를 바쳐야 했던 아들과 딸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나라와 가족을 지켜낸 책임감과 끈기, 그 역사적인 삶의 속살들을 이제 하나씩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태백산맥과 동해바다의 영험한 기운이 만나는 명품 자연의 도시 강원도 삼척. 삼척은 웅장한 산맥과 너른 바다를 마치 자신의 울타리인양 끼고 있는 도시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수려한 자연이 도시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공격명 ‘폭퐁’. 북한은 이날 강릉,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 등 11개 지점의 38도선 지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이후 휴전 협정때까지 3년간 지속된 팽팽한 싸움에서 남북은 한반도를 오르내리며, 서로의 희생을 묵인했다.


그 잔혹한 전쟁터의 허리 밑. 덩그러니 아름다운 곳에 삼척이 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절, 대한민국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삼척 도계탄광은 약 86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광부들의 생계를 책임진 곳이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곳에도 1950년, 전쟁이 덮쳤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삼척 일대의 모든 광업소들은 생산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전력 공급에 필요한 화력발전소의 에너지원이 석탄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석탄 공급은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광업소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진행하는 한편 전쟁 중에도 생산을 병행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1951년 4월 삼척의 장성광업소가 그해 9월에는 도계광업소가 10월에는 근처 영월광업소도 다시 석탄 생산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박상철 화백 作


삼척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성내동 성당이 위치해 있다.

1949년 10월 천주교가 무엇인지, 신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던 시절, 이곳의 초대 주임신부로 제임스 매긴 신부가 보임한다. 당시에는 딱히 성당이라고 보일만한 건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푸른 눈의 외국인이 가정집에 살고 있구나 정도로 주민들은 생각했다고 한다.


주임신부로 보임한 제임스 매긴 신부는 당시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자신의 집에서 아이들이 사과를 훔쳐 가자 자상하게 타이르면서 사과나무에서 아이들이 훔친 것보다 더 좋은 사과를 한 아름 따서 돌려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매긴 신부는 1950년 7월 1일 인민군이 삼척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인민군에게 체포되기에 이른다.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카톨릭 신앙으로 무신론자와 맞서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성당을 지켜야 한다’라고 피신을 거절했다.


매긴 신부는 마지막까지 인민군의 고문과 매질에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로부터 나흘 뒤인 7월4일끝내 인민군의 총부리에 순교당하고 만다.


대이리는 삼척에서도 가장 두메산골에 속한다. 지금이야 시내에서 차를 타고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과거에는 외나무다리를 몇 개 건너야 닿을 수 있던 산골 마을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면 계곡물이 불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길이 끊겼던 곳이며, 마을 앞쪽으로는 덕항산 촛대봉, 문바우, 양티봉 등 바위산들이 솟아 있어 꼭꼭 숨어 있는 그런 산골이었다.


그런 대이리에 실제로 사람이 사는 너와집이 한 채 남아 있다. 이 너와집은 지붕을 두꺼운 나무판자나 널조각으로 이어놓은 형태의 집으로 1636년 현재 소유자분의 선조가 병자호란 때 이곳으로 피란와 지은 집이라고 한다.


다행히 전쟁통에도 살아 남은 이집은 현재 남아있는 너와집 중 가장 오래되고 보존상태도 양호해 강원도 산간 지역 민가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떠올리면 보통 이름 있는 커다란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억하곤 한다. 하지만 삼척의 탄광이나, 두메산골, 어느 작은 해안가 마을 주민들처럼 당시의 모든 국민은 각자의 위치에서 전쟁이란 공포를 감당하고 예기치 못한 희생을 치렀다.


누군가는 말한다.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던 삼척은 그나마 다행인 곳이라고. 그러나 삼척 주지리 마을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골짜기 곳곳마다 인민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는 이웃을 목격하고 산 속으로 도망쳐야 했던 잊지 못할 그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감내하고 극복해 온 결과로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7번 국도 이야기, 강릉편으로 이어집니다.>


도움말 : 권기봉 작가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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