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6주년, 골목의 역사를 만나다] 이역만리를 돌아 한국의 골목으로
백년이 지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에 둥지를 튼 골목의 고려인 식당들
실물경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해 온 서울경제TV는 2021년 광복 제76주년을 맞이해서, 마치 우리 주변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가볍게 지나쳐 온 역사적 유적과 유물에 대해 ‘아카이브 기획 취재’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흔적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성과들이 험난했던 그때를 살았던 선조들의 의지와 극복 과정이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음을,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이번 기획 취재는 임진왜란과 구한말 혼란기,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반드시 영광스럽지만은 않은 유적과 유물일지라도 역사적 고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 간직되어 온 아픈 흔적들조차 끌어내고 보존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려 합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족보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더 소중히 느껴질 때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게 되고, ‘아픔’이 담긴 유물이라는 이유로 관리가 소홀해진다면 자칫 그 과오는 반복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도, 연해주, 사할린으로 쫓기듯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징병과 위안의 이름으로 꽃다운 청춘을 버려야 했던 아들과 딸들, 삭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나라와 가족을 꿋꿋이 지켜내 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흔적들, 그리고 이역만리 100년의 시간을 돌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에 다시 둥지를 튼 골목의 고려인 식당들 모두가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 할 아픔과 영광의 역사들입니다. <편집자주>
김구, 윤봉길, 유관순, 안중근.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준 가슴 시리는 선조들.
간도, 연해주, 상해, 러시아 각지에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하늘아래 갈망했던 것은 오직 하나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
그 흩어져 있던 선조들의 후손이 100년을 돌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서울의 어느 골목 안으로...
조선인들이 한반도에서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60년경부터였다. 먹고 살기 위해서, 경작할 땅을 찾아서 하나 둘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일제 강점기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식량 해결의 어려움, 헌병에 의한 압박이 노골적으로 심화되면서,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몸담기 위해서 간도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게 된다. 이주 과정조차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그러나 막상 연해주 등 러시아 땅에 이주한 우리 민족을 대하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일본인과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외형상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과 한참 동아시아의 패권다툼에 열중하던 러시아는 이런 국가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워 사상과 성향에 구별없이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다. 강제 이주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중앙아시아까지는 한겨울 30일이 넘게 소요되었다.
우리 민족이 짐짝처럼 버려진 그곳은, 당장에 경작할 땅도 집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이역만리, 억울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기에 그들은 땅을 파서 토굴을 만들고, 맨손으로 땅을 일궜다.
우리 민족이 주식으로 먹는 쌀을 생산하기 위해 굶주림을 참아가며 그 먼 타향에서도 겨우내 보관한 볍씨로 농사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수 천 년간 갈대밭이던 척박한 땅은 옥토로 변화시켰고 급기야 우주베키스탄을 쌀농사 지역으로 변모시키고야 만다.
서울 중구 광희동,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 (光熙門)의 이름을 딴 동네다. 이곳에는 한글 간판보다 카릴문자가 흔하게 보이는 러시아 몽골타운인 ‘중앙아시아 거리’가 있다.
박상철 화백作
한국은 1990년 3월에 몽골과 수교를 했고, 그 해 9월에는 구 소련과 수교를 하면서 광희동 지역은 몽골을 비롯해서 구 소련 국가의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된 대표적인 곳이다.
1990년 수교 이후로 동대문 의류상가 주변으로 보따리 장사들이 부쩍 늘면서 원스톱으로 환전할 수 있는 곳, 숙박과 식사를 안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광희동 일대가 되었고, 차츰 사람이 몰리게 되면서 주변에는 중앙아시아 음식점들이 줄줄이 생겨나게 되었다.
누군가는 보르시를 끓이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따듯한 홍차에 자신에게 맞는 나폴레옹 케익을 굽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광희동의 음식 문화는 점점 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색깔을 더 짙게 띠게 되었다.
이곳 광희동에는 고려인 3세 야나 씨가 운영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이 있다. 보기에도 화려한 메뉴판 속에서 고려인들의 문화가 담긴 음식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김치라고는 하는데 중앙아시아에서는 구하기 힘든 배추나 무보다는 당근으로 만든 김치도 눈에 띈다.
‘필라프’라는 이른바 ‘기름밥’은 밥으로 만든 생김새도 맛도 우리의 볶음밥과 유사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먹었을 음식들. 그 당시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면서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김치도, 된장도, 간장도 다 직접 만들어 드셨다고 한다.
트고 갈라진 손가락 끝마디로 2세대를 거슬러 할머니가 짓고 어머니에게 먹였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들의 음식이 지금 한국의 광희동 골목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버려진 곳에서 최선을 다해 생존하고, 외로움과 그리움을 그저 음식으로 달래야 했을 고려인들. 백 년이 훌쩍 지나서야 고려인 후손들은 이역만리를 돌아 선조의 고향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서울의 어느 골목을 차지하고 있는 낯선 이들이 꽤 정겹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역사 속, 같은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는 특별한 인연 때문일 것이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도움말 : 권기봉 작가,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이훈 이야기경영연구소 대표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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