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펜이네요"…한 자루 펜에 담긴 외교와 정치
경제·산업
입력 2025-09-02 07:00:09
수정 2025-09-02 07:00:09
김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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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 펜’ 한마디에 웃음 번진 회담장
대통령들이 나눠 가진 서명용 펜의 역사
수제 만년필, 한국판 ‘펜 외교’ 문을 열다

[서울경제TV=김민영 인턴기자] “좋은 펜이네요(Nice pen).”
지난 25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서명식 현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의 만년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웃으며 “제가 직접 가져온 겁니다”라고 답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가져가실 건가요?”라며 농담을 던지자 이재명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펜을 건넸다.
이후 트럼프가 만족감을 표시하자 서명식장의 긴장된 공기가 순간적으로 누그러졌다. 만년필 한 자루가 현장의 분위기에 일조한 셈이다.
이날 이 대통령이 건넨 펜은 대통령실의 요청으로 국내 수제 공방에서 약 두 달여에 걸쳐 제작된 특별 주문품이었다. 탁현민 국회의장 행사기획 자문관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 대통령 측이 맞춤 제작 만년필을 준비한 것은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불거진 ‘네임펜 논란’이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2018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서명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네임펜으로 서명하자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불러왔고, 당시 의전을 책임졌던 김종천 의전비서관에게까지 비판이 쏟아졌다. 중요한 정상회담과 선언문 서명에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던 만큼 논란은 커졌다.
이 같은 전례를 의식한 이 대통령 측은 펜 하나에도 국가의 위상과 상징성이 담긴다고 보고, 국내 공방에 맞춤 제작 만년필을 특별히 의뢰했다. 태극과 봉황 문양이 새겨진 케이스와 다듬은 모나미 펜심까지 더해진 이 만년필은, 외교 무대에서 ‘격에 맞는 서명 도구’를 갖추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다.

◇ 냉전 종식의 순간을 기록한 만년필
외교 현장에서 펜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상징적 도구로 활용돼 왔다.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가 바로 1987년 12월 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중거리핵전력(INF)협정 서명식이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파카 만년필로 공동 서명했는데, 이 협정은 냉전 시대의 종결을 알린 역사적 조약으로 평가된다. 특히 두 정상이 사용한 ‘파카 75’는 각자의 이름이 각인된 특별 제작 만년필이어서 큰 화제가 됐다.
서명을 마친 뒤 두 정상이 만년필을 서로 교환하는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펜 외교’의 상징적인 순간으로 회자된다. 작은 만년필 하나가 강대국 간 긴장 완화를 보여주는 외교적 제스처로 기능했던 셈이다.
작은 공방에서 만들어진 이재명 대통령의 만년필이 외교 무대에 등장한 모습이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이런 오랜 전통 때문이다. 펜은 정치와 외교의 상징으로서 국가 이미지를 드러내고, 때로는 역사적 전환점을 기록하는 상징물이 된다.
◇ 정치적 공로을 나누는 상징물
펜은 미국 정치에서 오래전부터 정치적 상징으로도 활용돼 왔다. 대통령은 주요 법안이나 협정 서명 때마다 새로운 펜을 사용했고, 서명에 쓰인 펜을 입법·정책 추진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의미로 나눠주는 관행을 이어왔다.
이 전통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시작됐다. 그는 수많은 뉴딜(New Deal) 법안을 서명할 때 여러 자루의 펜을 번갈아 사용한 뒤, 법안을 발의한 의원이나 핵심 참모에게 나눠줬다.
이는 함께 역사를 만들어낸 증표이자 정치적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루스벨트가 시작한 관행은 후임 대통령들에게도 계승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냉전 체제를 이끈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고속도로망 건설을 주도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법안 서명식에서 사용한 펜을 보관하거나 측근에게 나눠주며 그 의미를 확대했다. 이 관행은 린든 B. 존슨 대통령 시기에 이르러 서명용 펜은 미국 정치문화 속 확고한 관습으로 자리 잡게 됐다.
◇ 존슨의 펜, 미국의 역사적 전환점을 기록하다
존슨 대통령은 1964년,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교육·공공시설 등 사회 전반에서의 평등권을 보장한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에 서명하면서 75자루 이상의 만년필을 사용했다. 이후 이 펜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포함한 민권 운동가들과 의원들에게 펜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따르면 존슨은 같은 해 세제개혁법 서명 이후엔 펜 네 자루를 들어 케네디 전 대통령 가족에게 각각 선물했고, 한 자루는 케네디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 펜들은 일부가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대통령 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정치와 외교의 역사적 순간을 증언하는 유물로 남아 있다.

◇ 국내 수제 만년필…외교 선물로 빛나다
존슨 대통령 당시 서명에 사용된 펜들이 오늘날 역사적 상징으로 전시되고 있듯,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선물한 한국산 만년필 역시 그런 의미를 지닌다.
트럼프에게 건네진 만년필은 서울 문래동의 수제 공방 ‘제나일’이 약 한 달 반 동안 제작한 주문품으로, 갈색빛 두툼한 몸체에 태극과 봉황 문양이 새겨진 케이스, 다듬은 모나미 펜심이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애초 별도 판매 계획은 없었지만 언론 보도 이후 주문이 폭주하면서 제작사가 접수를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시장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나이스 펜’ 언급 이후 한국 대표 문구 기업 모나미(Monami)의 주가가 급등한 것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모나미 주가는 전장보다 29.92% 오른 2575원에 거래를 마쳤으며, 7월 24일 이후 약 2000원 선에 머물던 주가가 하루 만에 치솟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외교 현장에서 나온 상징적 언급이 소비자와 시장의 관심을 자극해 실물 산업의 이미지 제고로 이어진 사례”라고 설명했다. /melissa6888@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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