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일의 인생한편] 사라진 얼굴과 자기기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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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5-10-11 11:58:42
수정 2025-10-11 11:58:42
이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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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얼굴>(2015)

과거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2016)이 보여준 속도감에 눈길을 빼앗긴 적이 있다. 당시 영화에서 출몰하는 좀비들과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승객들의 사투를 긴장하며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이후 넷플릭스와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그의 작품들을 챙겨보았다. 하지만 <부산행> 이후 작품들에 꽤 실망하고는 했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과도한 메시지 지향성,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 관객을 계몽하는 듯한 직접적인 이미지들이 한 명의 관객으로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전개의 급격함과 다소 예측 가능한 극적 장치들은 연상호의 스타일을 유지하지만, 이번 작품은 영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비극적인 가족사를 통해 한국 역사를 되짚어보는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영화들과 구별된다.
영화 <얼굴>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탐미주의 소설 <춘금초>(1933)를 변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춘금초>에서 남자 주인공은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주인공을 사랑하는데, 그녀가 자신을 떠나갈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자기 눈을 망가뜨리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이 작품에서 영규의 아들은 죽은 어머니인 정영희의 사인(死因)을 탐문하며, 어머니의 과거를 기억하는 인물들의 고백을 통해 1970-80년대를 살아가던 정영희의 삶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재구성한다. 여러 사람의 고백이 교차하며 재구성되는 정영희의 삶은 결과적으로 영화 말미에 과거를 고백하던 사람들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솔직하게 과거를 고백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정영희)의 외모와 행실을 비하하고, 자신이 참여했던 폭력을 타자(정영희)의 무능으로 치환하는 인간의 폭력성이 은밀히 나타난다.
이 영화의 절정은 정영희의 남편 영규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미를 향한 집착과 인정 욕망이 자기기만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얼굴>은 정영희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이 밝혀지는 가운데, 역사적 인간의 세 얼굴이 드러난다.

이렇게 영화 <얼굴>은 다니자키의 소설 속 설정을 빌려오되, 탐미주의를 전복하여 한국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치환하고, 한 개인의 집착과 가족의 파국을 통해 관객을 역사적 성찰로 이끄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연상호의 영화 세계는 이전보다 인간에 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심우일 선문대학교 K-언어문화기업학과 강사
·선문대학교 문학이후연구소 전임연구원
·롤링스톤 코리아 영화 부문 편집위원 활동
·전주국제단편영화제 프로그래머 역임
·TBN 전북교통방송 프로그램 ‘차차차’ 라디오 방송 활동
·웹진 <문화 다> 편집위원 역임
·제3회 유럽단편영화제 섹션 ‘삶을 꿈꾸다 (DERAMERS)' 책임 강연
·계간지 <한국희곡> 편집위원 역임
-연극인 인터뷰 <최치언, 정범철, 김광탁 작가> 및 연극 평론
‘인생한편’은 영화평론가 심우일이 매주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삶의 질문과 여운을 찾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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