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김춘학]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들리는 말들

전국 입력 2025-12-06 23:37:56 수정 2025-12-06 23:37:56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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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 문화다양성의 감각을 깨우는 순간

김춘학 다이룸협동조합 이사장

한달살기를 결심하고 필리핀 세부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이곳의 생활 리듬에는 낯섦이 남아 있다. 이동하려고 택시 앱을 열 때마다 새로운 화면을 마주하고, 시장에서는 단어 하나를 고르느라 잠시 멈춘다. 하지만 이 작은 ‘멈칫’이야말로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웠던 문화다양성의 감각을 깨우는 순간이 되고 있다. 익숙함 안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말의 결이, 낯선 환경에서는 훨씬 선명하게 들린다.

세부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과 현지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도시다. 카페, 리조트, 식당 어디를 가도 서로 다른 억양의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린다. 일본 여행객들은 문장을 최대한 정리해 부드럽게 말하려 하고, 대만 여행객들은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대화를 이어간다. 한국 여행객들은 비교적 빠르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같은 영어라도 말하는 방식만으로 각 나라의 문화적 리듬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별과 연령에 따라 언어의 결은 또 달라진다. 젊은 층은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관계를 빠르게 확장하는 반면, 중장년층은 단어 중심의 간결한 소통을 편안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현지 직원들과의 짧은 대화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자연스럽게 확인된다. 어떤 이는 문장을 신중하게 고르며 차근차근 말을 이어가고, 또 다른 이는 필요한 질문만 간단히 던진다. 이는 ‘잘한다·못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이 언어에 스며 있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일주일 동안 세부에서 가장 크게 체감한 점은, 언어가 단순한 전달 수단을 넘어 서로의 삶을 이해하게 하는 문화적 창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억양, 말의 속도, 표현 방식 같은 요소들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관찰의 대상이 된다. 현지인들이 여행객의 다양한 언어적 특징을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정확성’보다 ‘관계’가 중심이 되는 소통 문화를 보여준다.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한국에서의 언어 사용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표준어와 정확한 표현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만, 정작 관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상대의 말하기 방식 속에 담긴 삶의 리듬을 이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부에서는 서툰 영어도 소통의 걸림돌이 아니다. 서로의 말투 차이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말의 완성도보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더 큰 역할을 한다.

이 감각은 우리 지역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2023년, 군산의 외국인 주민 비율은 처음으로 5%를 넘어섰다. 같은 해 11월 기준 장기 거주 외국인 주민은 13,374명에 이른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군산의 일상이 이미 다양한 국적과 언어가 공존하는 환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변화다.

군산의 거리에서도 다양한 억양과 말투를 만나는 일이 이제 낯설지 않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는 순간, 버스 정류장에서 길을 묻는 대화, 공장과 시장에서 함께 일하는 이웃들의 목소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마주한다. 문화다양성은 특별한 영역의 과제가 아니라, 지역의 일상에서 이미 진행 중인 흐름이다.

세부에서 배운 감각을 군산의 현실에 적용한다면, 낯선 말투를 ‘서툼’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배경으로 이해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언어의 차이는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군산이 더 많은 사람을 품는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거창한 계획보다 태도의 변화다. 익숙하지 않은 억양에도 귀 기울이는 마음, 서로 다른 말하기 방식을 존중하는 감각이 지역의 관계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세부에서의 한 달 살기 첫 주에 얻은 이 배움이 우리 지역에서도 더 넓은 관계를 여는 작은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 김춘학 로컬리스트
·다이룸협동조합 이사장
·다이룸문화예술교육연구소 대표
·군산시 정책자문단 위원
·다문화사회전문가 
·문화기획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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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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