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김춘학] 2026년, 우리들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김춘학 다이룸협동조합 이사장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의외로 관계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 “올해는 불필요한 관계는 정리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야지.” 다이어트나 운동 계획만큼이나 관계는 늘 새해 다짐의 단골 주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다짐은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밀려난다.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갈 자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원래 거창한 약속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같이 무언가를 하자고 결심해서 생긴 것도 아니다. 동네 골목에서 마주친 인사, 가게 앞에서 잠시 나눈 말,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잠깐 앉아 있던 시간 속에서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관계는 의지가 아니라 머뭄의 결과였다.
아침마다 집 근처를 산책하는 어르신을 떠올려본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집 안에만 있기엔 하루가 너무 길어서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를 자리가 없으면 그 산책은 금세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어르신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일정이 아니라, 잠깐 앉아도 괜찮은 자리 하나다.
시장 골목에서 하루를 보내는 상인도 다르지 않다. 손님이 없는 시간, 가게 앞에 서서 거리를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도 말을 건네기엔 망설여진다. 의자를 하나 내놓고 싶어도 괜히 눈치가 보인다. 이 골목에 오래 머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치 하나가 놓이면 풍경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는 앉고, 누군가는 멈추고, 그 사이에서 인사가 오가며 공간은 다시 사람의 온도를 회복한다. 이런 장면들을 떠올리다 보면, 관계가 사라진 이유는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공간의 리듬이 너무 빨라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목적지로, 다시 집으로. 머무는 시간은 사라졌고,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줄어들었다.
관계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관계가 시작될 조건이 줄어든 셈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도시를 바꾸는 방식 역시 조금 더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보다,
어디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 말이다.
그 시작으로 ‘소셜벤치’를 제안한다. 소셜벤치는 거창한 시설이 아니다. 특별한 기능도, 큰 예산도 필요 없다. 다만 누구나 앉을 수 있고, 말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자리다. 관계를 만들겠다고 앞장서기보다, 관계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공간이다.
2026년의 시작에서, 그리고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입후보 예정자들이 거창한 공약을 앞세우기보다 이런 일상의 변화를 먼저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다시 앉고, 머물고, 말을 걸 수 있게 하겠다는 작지만 진정성 있는 약속 말이다.
관계는 공약으로 생기지 않는다. 관계는 자리가 있을 때 시작된다. 새해의 첫 시작이 또 하나의 계획표가 아니라, 이 도시의 일상에 작은 자리를 내어주는 말이기를. 그래서 관계가 다시, 조용히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 김춘학 로컬리스트
·다이룸협동조합 이사장
·다이룸문화예술교육연구소 대표
·군산시 정책자문단 위원
·다문화사회전문가
·문화기획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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