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일 되새기며 매천 황현 역사탐방 해봐요"

전국 입력 2023-08-23 17:36:46 수정 2023-08-23 17:36:46 김준원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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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8월29일 경술국치일, 황현 생가 역사공원 탐방 제안

당시 최고 초상화가였던 채용신이 그린 '매천 황현의 초상화'(보물 제1494호). [사진=광양시]

[광양=김준원 기자] 전남 광양시가 다가오는 경술국치일에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로써 항거한 매천 황현의 생가와 역사공원을 찾는 역사탐방을 제안했다.


경술국치는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사건으로 경술년(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역사의 비극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한일신협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하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제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치욕을 느꼈던 매천은 경술국치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9월 10일)로 선비의 지조를 지켰다.


평생 벼슬에 오르지 않은 매천이었지만 "나는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됐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유서로 지식인의 책임을 일깨웠다.


그가 남긴 절명시에는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등 기울어가는 국운에 대한 비통과 인간적 고뇌가 서려 있다.


당시 경남일보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매천의 절명시 4수에 애도의 글을 붙여 보도(1910년 10월 11일)한 사유로 일제로부터 약 열흘 간 정간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1914년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은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시네/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라는 친필 추모시로 매천의 넋을 기렸다.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추앙받는 매천은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문장가이자 47년간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역사가다. 1855년 광양 백운산 문덕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매천은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난 신동으로 20대에 만 권의 책을 읽을 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문장으로 불리는 이건창, 한문학자 김택영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과 웅숭깊게 교류했으며 한말삼재로 일컬어질 만큼 탁월한 문인이었다.


1883년(29세), 매천은 큰 포부를 안고 별시 문과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했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밀리자 벼슬의 뜻을 접었다. 5년 뒤 부친의 간곡한 권유로 생원시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했지만 부패한 관료사회를 개탄하며 대과를 포기하고 낙향해 예리한 통찰력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데 전념했다.


대표 기록물인 '매천야록'에는 대원군 집정(1864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 위정자의 비리, 일제의 침략상, 민족의 저항 등 47년간의 역사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매천야록'은 '오하기문', '절명시첩', '유묵․자료첩', '문방구류', '생활유물' 등과 함께 3.1운동 100주년이 되던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벼슬길을 버리고 끈질긴 기록자로 살다가 자결로써 긴 삶 대신 길이 남는 삶을 선택한 매천 황현은 두 장의 사진과 한 장의 초상화로 남아있다.


당시 최고 초상화가였던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는 매천이 자결한 이듬해 매천의 사진을 모사한 것으로 뛰어난 사실적 묘사와 예술적 완성을 이룬 초상화의 백미로 꼽힌다.


2006년 12월 문화재청은 대한제국기 초상화의 새로운 면모와 특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매천의 초상화를 사진 2점과 함께 보물(제1494호)로 일괄 지정했다.
 

1962년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광양시는 매천황현생가 복원, 역사공원 조성, 매천동상 건립 등 매천의 숭고한 우국정신을 기려왔다.


단아한 초가지붕을 인 매천 황현의 생가에는 매천의 사진,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고 마당 한편에는 절명시가 세워져 망국의 비극과 지식인의 책무를 상기시킨다.


매천 황현의 생가(보물 제1494호). [사진=광양시]

생가에서 500여 m 떨어진 매천역사공원에서는 매천 선생의 묘역, 붓과 책을 형상화해 매천의 일대기를 적은 기념비, 창의정, 영모재, 문병란 시인의 ‘매천송’ 시비 등이 방문자의 발걸음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정구영 관광과장은 “매천 황현이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와 그가 묻혀 있는 역사공원을 찾아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의 치욕을 되새기고 나라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의 안목을 지닌 꼼꼼한 기록자이자 죽음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영원히 지지 않는 역사의 꽃으로 피어난 매천 황현을 추모하는 시간도 가져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kimnew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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