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전승훈]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전국 입력 2025-11-01 12:04:31 수정 2025-11-01 12:04:31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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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은 10월 31일, 금요일이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은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 가사 속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노래는 계절이 잊혔다고 말하지만,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끝내 10월의 마지막 밤을 선명하도록 기억해 낸다. 어떤 순간들은 많은 사람에게 영원처럼 남는다. 우리는 이를 과거·현재·미래. 즉, 시간(時間)이라고 부른다.

한편, 시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 있다. 그곳으로부터 여기를 구분 짓는 거리, 그리고 여기로부터 그곳을 구분 짓는 거리. 우리는 이를 통틀어 공간(空間)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 속에 공간이 포함될 때 우리는 ‘언제’,‘어디서’를 떠올리며 하나의 ‘사건’을 떠올린다.

그 사건을 완성하는 것은 인간(人間)이다. ‘무엇’을 실행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이 필요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세 개념 모두에 ‘사이 간(間)’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 속에는 필연적으로 ‘사이’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사이가 있을 때 “그것과 이것은 각자 주체로서 구분되고 독립되는가?”, 아니면 “그것과 이것은 비로소 관계를 맺게 되는가?”라고.

2005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에는 장생과 공길이 장님놀이를 하며 주고받는 대사가 나온다.

(장생)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냐.”, (공길)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장면 속 두 사람이 서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 공교롭게 서로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시간과 공간 속 두 사람의 존재는 독립되어 있지만 관계를 통해 서로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장생과 공길은 인연(因緣)으로 맺어진 인간이 된다.

결국 ‘사이’는 단절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다. 서로가 온전히 겹치지 않기에 구분이 가능하고, 구분이 있기에 관계가 가능해진다. 차이는 분열이 아니라 식별의 기준이며, 그 식별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타자를 더 분명히 이해한다. 

우리는 흔히 거리를 부정적으로 보지만, 거리는 배제가 아니다. 적절한 거리는 시야를 확보하고 판단을 가능하게 하며, 그 판단이 관계의 지속 방식을 조정한다. 그러므로 가까움과 멂의 조율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기술에 가깝다. 이 기술이 성숙할수록 관계는 과도한 침범 없이도 지속되고, 무관심 없이도 독립을 보존한다.

‘시간’에서도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현재는 단지 순간이 아니라 의미를 재배열하는 기준선에 가깝다.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의 사건을, 해석을 통해 다시 배치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계획으로 구체화한다. 이 결정은 현재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 결정에 따라 과거의 서술은 교정되고, 미래의 방향은 수정된다. 결국 현재는 양자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공간’ 또한 관계로 구성된다. ‘여기’와 ‘그곳’은 단지 지도상의 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소통할지에 대한 합의와 기대가 겹쳐 만든 체계다. 즉, 같은 장소라도 관계의 규칙, 역할 배치, 기대 수준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장’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와 ‘그곳’은 거리를 나타내는 수치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방식이 응축된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는 위의 내용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이 아닐까.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의미를 획득하는 지점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의 ‘사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고립을 통해 얻는 자유가 아니라, 타자와의 간격을 스스로 조절할 때 얻는 자유다. 비켜섬, 기다림, 응답 같은 단어들은 이 자유의 구체적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는 결코 공허(空虛)의 단어가 아니다. 시선, 말걸기, 멈춤, 양보, 재확인 같은 구체적 행위가 쌓이는 과정이다. 관계는 큰 서약보다 작은 반복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어떤 거리를 유지할지, 언제 말을 건넬지, 어느 지점에서 멈출지 같은 미세한 결정들이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이런 반복이 신뢰를 만든다. 신뢰는 감정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예측 가능성의 축적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제 ‘지금-여기-나’를 최종 축으로 놓아 보자.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실행의 시간, 여기는 저곳과 그곳을 조직하는 규칙의 자리, 나는 너와 우리 사이에서 책임을 떠맡는 주체다. 이 세 축이 맞물릴 때 비로소 방향이 결정된다.

결국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거리를 유지하고, 어떤 속도로 다가서며, 어떤 규칙을 공유할 것인가. 답은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를 무시하면 관계는 흐릿해지고, ‘사이’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면 관계는 경직된다. 필요한 것은 사이를 감당하는 훈련, 곧 관찰과 절제, 대화와 확인의 반복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이 공유한 규칙이 결합해 하나의 사건이 되었고, 그 사건은 이후의 선택을 미세하게 조정해 왔다. 우리가 매해 그 밤을 떠올릴 때 과거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기준이 된다.

그렇게 ‘사이’를 다루는 능력이 조금씩 나아질 때 우리는 어떠한 변화 속에서도 변함없는 사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공간·인간 속의 ‘사이’는 지금, 여기, 나를 통해 계속 결정되고 있다고. 이 말은 결론이라기보다 다음 선택을 위한 기준에 가깝다. 그래서 문장을 닫지 않고 남겨 둔다. 다음 만남과 다음 결정을 위해, 약간의 여백을 보존하기로 한다.

▲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문화통신사협동조합 전략기획실장
·익산시문화도시 지원센터 사무국장
·원광대학교 HK+지역인문학센터 행정실장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심의위원
·익산시민역사기록관 운영위원
·부안군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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