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전승훈] 우리는 과연 어떤 춤과 노래로 서로를 맞이해야 하는가

전국 입력 2025-08-23 21:30:40 수정 2025-08-23 21:30:40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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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2200년 전, 바람에 실리듯 낯선 땅에 당도한 왕이 있었다.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 준왕. 그는 나라를 잃고, 백성과 함께 떠나야 했다. 뒤돌아볼 수 없는 절망 끝에서 맞이한 땅은 마한(馬韓)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기대하기엔 그 땅의 눈빛은 차갑지 않았을까? 이주민을 바라보는 토착민의 시선은 경계와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었고, 낯선 언어와 풍습은 두 집단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게 했다. 우리는 결과가 되어버린 역사를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역사가 되기 위한 공존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총괄기획으로 참여한 극단 작은소동의 2025년 지역대표예술단체 육성 지원사업 창작 초연작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이 오래된 공존의 순간을 오늘의 무대 위로 불러오는 공연이다.

작품은 준왕의 이야기를 단순한 역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준왕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한왕(韓王)’, 백성과 호흡하는 존재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여기서 ‘왕’은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다. 춤과 노래로 마음을 모으는 사람,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상징이다.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이고, 노랫가락이 공기 사이를 흘러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어놓던 그것. 말보다 깊은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만남을 시작하도록 끌어낸 것은 비단 한 명의 왕이 해낸 정치적 성과만은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공연은 고조선과 마한, 토착민과 이주민, 전쟁과 평화라는 경계들을 교차시킨다. 그러나 그 경계는 적대의 장벽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작동한다. 작품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장치는 춤과 노래다.


언어는 갈등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마음을 여는 힘은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춤은 몸의 기억을 흔들어내고, 노래는 심장의 리듬을 일깨운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한 소통의 도구이며,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 신비로운 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문화(韓文化)’의 오래된 미래와 마주한다. 한문화는 권력의 연합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 아니라, 예술과 감정으로 회복되는 관계, 다시 말해 공존과 통합의 힘을 노래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맥락은 오늘의 K-컬처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와도 닿아 있다. 세계인이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단지 한국의 문화가 가진 특수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감정의 공명, 언어를 넘어서는 공감의 힘이야말로 K-컬처의 가장 본질적인 자산이다.

공연이 보여주듯, 춤과 노래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다른 세계를 잇는 바람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서도 표현되었듯, 모두를 하나로 이어 세상을 지켜 이롭게 하는 ‘혼문’과도 같은 것이 바로 K-컬처가 아닐까?

그런 까닭에 익산이 진정으로 한(韓)문화의 발상지를 표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익산이 옛 마한(馬韓)과 지리적 무대가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마한의 옛 땅을 넘어, 이번 공연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오래된 이주와 만남의 기억이 서린 땅이 이곳이 바로, 익산이라는 점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즉, 이 공연에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들어있다.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갈등 속에 산다. 세대와 세대가 부딪히고, 지역과 지역이 갈라지며, 이념의 언어는 서로를 향한 벽이 되곤 한다.

그럴 때 예술은 묻는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은 공연 속 준왕과 마한 사람들에게만 던져진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권력자 간의 이해나 정치적 연합을 논하지 않는다. 특별한 권력을 지닌 특정한 누군가가 시대를 바꾸는 주역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감정과 예술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바로 그 과정이야말로 ‘한문화(韓文化)’가 오래도록 지켜온 본질이며, 지금도 세계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우리는 흔히 K-컬처를 ‘세계인이 소비하는 상품’으로만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통해 감히 말해보고 싶다. K-컬처의 본질은 상품성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있다고. 바람처럼 스며드는 춤과 노래가 그렇듯, 한문화가 지닌 힘은 낯선 이를 품고, 경계를 넘어 이어지며, 서로의 고통과 희망을 공유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 힘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공존이란 타인을 지워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함께 노래하는 일이다.” 이 공연이 끝난 뒤, 관객의 마음속에 남는 것은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질문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떤 춤과 노래로 서로를 맞이해야 하는가.

▲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문화통신사협동조합 전략기획실장
·익산시문화도시 지원센터 사무국장
·원광대학교 HK+지역인문학센터 행정실장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심의위원
·익산시민역사기록관 운영위원
·부안군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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