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전승훈] 미생(未生)이 완생(完生)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우리의 기록

전국 입력 2025-11-29 14:11:12 수정 2025-11-29 14:11:12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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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익산시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 전시회
익산군이 이리양을 만났을 때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올해 초, 익산시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바로 익산시민역사기록관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필자의 올해 나이, 고작 44세. 심지어 X세대도 아닌, MZ세대의 맏이 정도로 분류되는 나에게는 진심으로 황송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루하루의 삶조차 아직 습작(習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미생(未生)인데, 그런 이에게 역사를 논하는 일을 맡기겠다니. 어디 그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염치 불고하고 운영위원 역할을 기꺼이 수락한 이유가 있다. 시민들의 삶의 기록을 더 흥미로운 콘텐츠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익산시의 제안, 그리고 개인의 기록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발견하면 좋겠다는 방향성이 필자의 가치관과 대동소이(大同小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익산시는 2021년 행정안전부의 <주민주도형 지역균형 뉴딜 공모사업>에서 도내 최초 ‘민간기록 디지털 아카이브 조성 구축’이라는 주제로 선정되었고, 이를 계기로 2024년 1월 8일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을 공식 오픈했다. 

이곳에서는 온라인 사용자라면 누구나 디지털화된 익산 관련 기록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도시의 역사와 변천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라지거나 소실될 우려가 있는 익산의 역사·문화 기록을 영구 보존해, 많은 시민이 함께 익산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공유하도록 돕는 온라인 수장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익산시는 2021년부터 <익산시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을 통해 시민들로부터 의미 있는 기록물을 기증받아 수집해 왔다. 그 결과 2025년 현재까지 총 5회에 걸친 공모전과 별도 기증을 합해 무려 1만 점이 넘는 기록물을 소장하게 되었고, 이로써 익산시가 명실상부 민간 기록의 선도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옛 익옥수리조합 건물을 새로 단장해 2023년 12월 23일 문을 연 익산시민역사기록관은 이러한 민간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동시에 ‘시민도슨트 양성과정’, ‘기록과 함께하는 음악회’, ‘기록관 십자말풀이’ 등 기록을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 자체를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기는 살아있는 현장이 되고 있다.

필자 역시 2025년 첫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운영위원 위촉장을 받았다. 그날 회의의 주제는 올해 진행할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의 방향과 타이틀을 정하는 일이었다. 그때 필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 30주년이 바로 2025년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난 1995년 5월 10일, 이리시와 익산군은 지역 균형발전과 행정의 효율화를 목적으로 하나의 행정구역, ‘익산시’로 새롭게 출범했다. 물론 통합 30주년을 맞은 도시가 익산시만은 아니었다.

당시 「도농복합 형태의 시 설치에 따른 행정특례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가까이는 김제시·김제군이 통합되었고 전국적으로는 사천시, 평택시, 김해시, 아산시 등이 저마다 통합의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도시에 새로운 이름 석 자를 얹었다고 해서, 그 통합이 곧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무수한 사례들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가깝게는 현재 전주시와 완주군이 통합 논의를 둘러싸고 겪고 있는 진통만 보아도 충분하다.

그러니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도, 아직 완전히 ‘완생(完生)’에 이르렀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지난 30년의 갈등과 조율의 기록이 쌓여, ‘통합의 미생’에서 ‘공동체의 완생’으로 다가가는 중임은 틀림없다.

이런 까닭에 필자는 이번 공모전의 방향을 ‘통합 30주년’에 맞추되,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이 지닌 의미와 앞으로의 방향성을 함께 드러낼 수 있는 비유적인 타이틀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놓은 제목이 바로 '익산군이 이리양을 만났을 때'였다. 물론 도시와 군의 통합을 연인의 관계에 그대로 빗댈 수는 없겠지만, 지난 30년의 과정을 떠올리면 이 비유가 전혀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미혼 남성을 부르는 호칭 ‘군(君)’과 행정구역 이름인 익산군(益山郡)의 ‘군’자가 한글 표기로 같다는 점에 착안했고, 이리시(裡里市)에는 미혼 여성을 부르는 호칭 ‘양(孃)’을 붙여 두 지역을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에 비유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다소 달콤한 러브스토리 같은 타이틀처럼 보이지만, 솔직히 말해 필자가 전하고 싶었던 뉘앙스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나날은 결코 순탄하기만 하지 않다. 살아온 환경과 사용해 온 언어의 차이, 서로 다른 가치관과 구애 방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다툼도 잦고, 꾹 참고 맞춰주는 일, 섭섭함을 드러내지 못해 속앓이하고야 마는 밤도 부지기수다. 이 모든 과정이 차곡차곡 쌓이고, 풀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연인의 사랑은 단단해진다. 각자의 애정을 넘어 ‘관계’로 이어지는 사이, 서로의 삶을 함께 책임지는 사이가 된다.

결국 '익산군이 이리양을 만났을 때'라는 타이틀은 두 지역이 지난 30년 동안 혹여 겪었을지도 모를 수많은 갈등을 이겨내고, 이해하고, 풀어간 오랜 연인처럼 지금의 익산시로 서 있게 되었다는 데 바치는 하나의 헌사(獻辭)다. 동시에, 막 만남을 시작한 연인의 풋풋하고도 긴장 어린 설렘을 다시 떠올려 보자는 의미를 함께 담은 제목이기도 하다.

현재 익산시 마동공원 내 수림재 1·2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5회 익산시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 전시회 – 익산군이 이리양을 만났을 때>와 이곳에 전시된 1,530여 점의 민간 기록은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에 익산시는 더 많은 시민이 두 지역의 풋풋한 만남과 단단해진 애정을 마주할 수 있도록 12월 28일까지 전시회를 연장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오는 12월 23일에는 익산시민역사기록관 개관 1주년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시민이 곧 주인공이 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 기록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비록 이번 공모전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된 기록물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 현장에는 필자에게 유독 애착이 가는 기록물이 하나 있다. 바로 원광대학교 HK+ 지역인문학센터에서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진행했던 <가족과 함께하는 글·그림 공모전> 응모 작품들을 모아둔 스크랩북 5권, 총 494점의 작품이다.

당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이 공모전의 작품들은 비교적 가장 최근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지금 익산시 어린이들이 지역의 문화유산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흔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지역의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이 고민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꾸밈없는 마음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의 서툰 글과 그림은, 아직 미생인 도시의 미래를 향한 작은 밑그림이다.

더불어 고백하자면, <가족과 함께하는 글·그림 공모전>은 필자 또한 기획과 운영에 초창기 몇 년간 함께했던 프로그램이다. 역시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 아니겠는가. 제아무리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 하더라도, 내 손길과 내 땀방울이 스민 흔적만큼 애정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게 민간 기록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와 그 서툰 흔적이 소중한 이유일 것이다. 

‘미생(未生)’이 끝내 ‘완생(完生)’에 이르는 과정.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 순간에도 1분 1초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고 있다.

▲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문화통신사협동조합 전략기획실장
·익산시문화도시 지원센터 사무국장
·원광대학교 HK+지역인문학센터 행정실장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심의위원
·익산시민역사기록관 운영위원
·부안군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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