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전승훈] 그 선에 나는, 가고 싶다

전국 입력 2025-05-31 14:27:46 수정 2025-05-31 14:27:46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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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지난 4월 30일부터 5월 9일까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우리는 늘 선을 넘지 Beyond the Frame'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영화제는 말 그대로 넘어서기 어려운 경계들, 침묵을 강요받아온 진실들, 그리고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로막던 편견의 ‘선(線)’들을 넘어선 영화제가 아니었나 싶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하거나 무시해 왔던 가치들을 향해 섬세한 ‘대안’과 더불어, 잃어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가치’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 것 같다.

허나 '선을 넘는다'라는 것이 어디 단지 도전과 개척의 영역이기만 하겠는가. 정현종 시인의 시 「섬」을 떠올려보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바다가 놓여 있고, 그 바다는 결코 직선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섬은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놓인 작은 점(點)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저 점으로 건너가는 일은 때로는 바람과 파도에 밀려,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 항해와도 같다. 그렇지만 비록 그 발자국이 더디고 헤매는 걸음이 될지언정, 망망대해를 떠가는 돛단배가 만들어낸 부서진 물거품의 흔적일지언정, 어느덧 아름다운 하나의 궤적이 되고야 만다. 결국 우리가 선을 넘는다는 것은 천천히, 그러나 오래 걸려도 필연적으로 이뤄져야 할 ‘만남’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번 영화제에서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를 만났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마디로 이방인(異邦人)이다. 네팔에서 오롯한 가치를 지니고 저마다 삶을 살아오던 주인공들은 꿈과 희망을 찾아 들어온 한국에서 단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된다. 바로 ‘이주노동자’. 그들은 이 낯선 땅에서 자신들의 존엄(尊嚴)을 잃지 않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시(詩)를 쓴다.

서로즈 서르버하는 시 「기계」에서 말한다.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여기는 사람이 기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기계가 사람을 작동시킨다.” 또한 러메스 사연의 시 「고용」은 가슴 아픈 고백이다. “하루는 사람에 너무도 지쳐서 내가 말했어요. 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과 결핍을 해결해 주셨어요. 당신에게 감사드려요. 이제는 나를 죽게 해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죽으렴!”

왜 하필 그들은 시를 썼을까. 공연 드라마투르그인 김슬기는 「존엄을 지키며 창작하기」(아르떼365, 2020.10.26.)에서 “예술가는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이다. 이때의 존재 증명이란 예술가가 단지 어떤 작품을 만든다는 의미를 넘어, 그 작품을 만드는 데 연루되는 모든 과정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온전한 인정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꿈과 희망을 찾아온 한국 속에서 이방인이 아니라 온전한 구성원이 되고자 절박하게 시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필자는 우리들 속의 이방인이 단지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한국이 45년 만에 초강대국이 된 건 한국인들이 스스로 기계가 되어 일했기 때문이야.” 이 말처럼, 꿈과 희망을 이루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는 어느새 자신을 기계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그리고 그 기계적 질서에서 벗어난 이들의 존엄을 짓밟고 부적응자, 이방인이라는 잔혹한 낙인을 찍은 건 아닐까. “기계는 맞아도 아프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은 아파요.” 결국 꿈과 희망을 이루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 이들은 타인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미명(美名)하에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정말로 그들 시구(詩句)의 내용처럼 “기계가 사람을 작동시키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오는 6월 3일, 길고도 아팠던 계엄과 탄핵의 시간을 넘어 새로운 대한민국의 꿈과 희망을 여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꿈과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온 국민이 지켜보는 대선주자 TV 토론 속 혐오와 비방의 언어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루 말할 수 없는 폭력적 언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는 기계 같은 이들에게 다시금 작동당해야만 하는 일일까. 결단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리고 잃지도, 잊지도 말아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 넘어야 할 선이 있다. 천천히, 그러나 오래 걸려도 끝내 닿아야 할 그 선에 나는, 가고 싶다.

▲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문화통신사협동조합 전략기획실장
·익산시문화도시 지원센터 사무국장
·원광대학교 HK+지역인문학센터 행정실장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심의위원
·익산시민역사기록관 운영위원
·부안군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취재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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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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