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유기준] 전승공예품은행, 오래된 손길이 미래를 두드리다

전국 입력 2025-12-14 15:47:07 수정 2025-12-14 15:47:07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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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악기은행’

유기준 (재)전주문화재단 공예품전시관운영팀 차장

전통공예를 마주할 때면 마음 한편이 조용히 일렁인다. 수백 번의 숨결과 손끝의 온기가 켜켜이 쌓인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시간이고 한 시대의 기억이다. 그래서 전통공예를 지킨다는 일은 단순히 ‘기술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우리 조상의 숨결을 미래로 건네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의 전승공예품은행은 바로 그 ‘건네기’를 위해 만들어졌다. 장인의 삶이 담긴 작품을 구입해 보관하고, 다시 사회 곳곳으로 흘려보내는 이 사업은, 마치 맑은 물이 강줄기를 타고 여러 마을로 스며들 듯, 전통공예의 가치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넓혀 가고 있다.


작품이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살아난다
공예품은 누구의 책상 위에서, 회의실 한쪽에서, 전시장의 빛 아래에서 비로소 살아난다. 전승공예품은행의 가장 따뜻한 지점은 바로 이 ‘만남’의 연결이다. 작품이 대여되어 새로운 공간에 놓이면, 그 순간 장인의 기술과 마음이 그 자리에 흐르기 시작한다.

공공기관의 직원들이 작품을 보며 “우리 전통에 이런 깊이가 있었나?” 하고 감탄하거나, 방문객이 작품 앞에 오랫동안 머물며 눈을 떼지 못할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전통은 박물관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감탄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아직은 아쉬움도 남는다. 좋은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기관이 전승공예품은행의 존재를 모르거나, 대여 절차를 어려워한다. 작품을 안전하게 운송하고 설치하는 체계도 더 다듬어져야 한다.

하지만 아쉬움은 곧 가능성이다. 전승공예품의 가치가 알려질수록, 작품이 쓰임을 만나고 사람들의 손길에 닿을수록 전통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전주문화재단에서 2년을 운영하며 느낀 것들
전주문화재단이 2년 동안 전승공예품은행 민간위탁 운영을 맡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이 사업이 ‘행정’이 아니라 ‘문화의 숨’이라는 사실이다. 작품을 들여오고, 장인을 만나고, 작품 대여를 돕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반응을 듣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깨달았다. 전통공예는 시간을 초월해 사람을 만나는 예술이라는 것을.

올해 11월, 한벽문화관 전시실에서 열린 「위대한 유산전」은 전승공예품은행을 통해 구입·보관된 작품 37종 66점이 한 공간에 관람객 앞에 섰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정교한 짜임과 반복된 손의 흔적, 재료가 품은 시간의 깊이는 별도의 설명 없이도 감탄을 이끌어 냈다.

“이건 옛것이 아니라 지금봐도 압도적이네요.”, “왜 이런 작품을 계속 보여줘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이 말들은 전승공예품의 가치가 보존 그 자체가 아니라 ‘공유될 때 완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위대한 유산전」은 전승공예품은행이 왜 ‘은행’이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분명히 말해준다. 축적된 전통의 가치가 사회로 흘러가고, 그 흐름이 다시 공예의 미래를 키워내는 선순환.

「위대한 유산전」은 그 순환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확실한 증거였다. 이 전시가 ‘유산’이 아닌 ‘현재’로 다가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묵묵히 전시를 추진한 담당자 김하준 직원의 헌신이 있었다.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2026년, 또 하나의 흐름이 시작된다 — ‘악기은행’
그리고 2026년, 우리는 전통의 흐름이 한 단계 더 넓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전승공예품은행과 함께 추진되는 ‘악기은행’ — 전통 악기 작품을 단순히 보관하는 데서 나아가, 실제로 연주할 수 있도록 대여하는 새로운 시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수십 년간 한 장인이 깎고 다듬어 만든 거문고, 가야금, 해금...

그 악기들이 《소리》를 다시 찾는 순간을 상상하면, 이것은 단순한 문화정책이 아니라 시간이 노래로 되살아나는 장면이 된다.

누군가의 손에서 울리는 첫 음, 그 음을 통해 장인의 기술과 마음이 되살아나고, 그 소리를 듣는 누군가의 마음이 또 다른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것... 악기은행은 바로 그 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다.


전통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이란,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짐은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전승공예품은행과 곧 시작될 악기은행이 장인의 작품과 기술을 단단히 품고, 사람들 곁에서 숨 쉬고, 울리고, 빛나는 길을 만들어가길 바란다.

그 길 위에서, 우리의 전통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를 두드리는 힘이 될 것이다.

▲ 유기준 (재)전주문화재단 공예품전시관운영팀 차장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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