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유기준] 한지 위에 시간을 새기고 빛을 입히다

전국 입력 2025-11-15 17:03:13 수정 2025-11-15 17:03:13 이경선 기자 0개

페이스북 공유하기 X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색지장 김혜미자

유기준 (재)전주문화재단 공예품전시관운영팀 차장

전북 전주의 조용한 마을 골목을 따라가면, 한지의 결이 은은히 느껴지는 한 공방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지의 향기와 함께 수십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작품들이 나를 맞이한다. 이곳이 바로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제60호 색지장 김혜미자 장인의 작업실이다.

어느 날 직접 댁을 찾았을 때, 방 안 가득 정갈히 놓인 공예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색을 달리한 한지들이 겹겹이 얹혀 백골(白骨)을 이루고, 그 위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김혜미자 장인은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며 조심스레 내게 들어보라 하셨다.

손에 쥔 순간 놀라웠다. 겉으로는 단단한 목재처럼 보이지만, 그 무게는 깃털 같았다. 가볍고도 견고한, 한지의 본질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때 나는 새삼 깨달았다. 한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장인정신이 응축된 ‘살아 있는 재료’라는 것을.

김혜미자 장인의 색지공예는 단순한 염색이나 장식의 영역을 넘어선다.여러 겹의 한지를 붙여 단단한 합지(厚紙)를 만들고, 색지로 다양한 문양을 칼로 새기고, 백골 위에 붙이는 정교한 작업.

그 과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 번의 손길과 기다림이 반복되며, 그 속에서 한지는 점점 생명력을 얻는다.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간이 새겨진 흔적이자 마음의 기록이다.

“한지는 제 인생이에요. 색을 입히는 일은 제 마음을 입히는 일이지요.”

장인의 말처럼, 김혜미자 장인의 작업은 결국 자기 내면을 한지 위에 새겨 넣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장인이 만든 작품들은 모두 따뜻하고, 살아 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달리 반짝이는 색지의 결 속에는 전주의 햇살과 물, 그리고 장인의 숨결이 배어 있다.

장인은 단지 개인의 예술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전주한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목표로 준비되고 있는 지금, 김혜미자 장인은 그 중심에서 한지의 우수성과 예술적 가치, 그리고 생활문화로서의 가능성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한지의 전통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감각으로 확장시키는 장인의 노력은 전주한지가 세계 무대에서 다시 빛날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장인은 또 지역의 후학들을 위해 수십 년째 문을 열고 있다. 한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찾아오면, 언제든 기꺼이 자신의 기술과 철학을 나눈다.

장인이 길러낸 제자들은 이제 전국 곳곳에서 한지공예를 이어가며, ‘전북의 색지공예’라는 뿌리를 확고히 다져가고 있다.

김혜미자 장인의 공방은 그 자체로 한지의 집이자 시간의 집이다. 그곳에서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된 한 장의 색지는,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를 잇는 다리이기도 하다.

한 장의 종이에 세계를 담는 사람. 그가 바로 김혜미자 색지장이다.

▲ 유기준 (재)전주문화재단 공예품전시관운영팀 차장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서울경제TV(www.sentv.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전체보기

기자 프로필 사진

이경선 기자

doksa@sedaily.com 02) 3153-2610

이 기자의 기사를 구독하시려면 구독 신청 버튼을 눌러주세요.

페이스북 공유하기 X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 0 / 300

주요뉴스

공지사항

더보기 +

이 시각 이후 방송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