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이민자, 최초의 기억] 하와이 이민자들의 삶
미국에 정착한 한인의 정신적 뿌리가 된 사람들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온 서울경제TV는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닿은 최초의 이민자 102명의 삶을 조명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추진합니다.
언론진흥기금 지원으로 진행된 이번 기획 취재는 땀과 눈물로 얼룩진 ‘코리아 디아스포라’ 한국 이민사 120년의 의미를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 년 전인 1903년 1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한국의 첫 이민자들은 미국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그리고 아이들 25명 ‘갤릭호’에 탑승해 하와이 땅을 처음 밟은 102명의 한국 이민자들은 가장 먼저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는 아시아에만 존재하는 전염병의 유입을 막기 위함 이었으며, 노동하러 온 노동자가 적응하지 못하고 병을 얻게 되면 농장주에게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진행됐다.
신체검사 결과, 최종적으로 사탕수수농장과 계약을 맺은 한국 이민자 수는 모두 86명이었다. 그들은 협궤열차를 타고 하와이 오아후 섬 북단에 위치한 사탕수수재배지인 ‘와이알루아’ 농장으로 향했다.
고국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한국 이민자들은 그렇게 하와이에서의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박상철 화백 作
새벽 5시 기상, 오후 4시30 퇴근, 하루 10시간의 노동과 30분의 짧은 점심시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의 하루일과는 규칙적이었다.
노동자를 식별하기 위해 목에는 번호표라고 하는 방고를 달고 잡초를 뽑는 일부터 시작해 수수를 등에 지고 기차나 마차에 싣는 일까지 뜨거운 땡볕아래 10시간 동안의 고된 작업이었지만 한국 이민자들은 점차 환경에 적응해 나아갔다.
낯선 환경에서의 고된 노동은 고국에서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에겐 큰 문제가 없었지만 도시 출신인 사람들에겐 매우 힘든 일이었다.
최초의 이민자들은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909년, 미주 지역의 한인 단체들을 통합해 ‘국민회’를 결성했다. 이후 1910년 5월에는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재편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석달 후 ‘한일 강제 병합’으로 대한민국은 주권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움 만큼이나, 한국 이민자들의 강인한 정신과 애국심은 국내의 조선인 못지않았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렇게 독립자금을 내놓으면서 모국과 연결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현재 남아있는 비석의 비문과 독립 자금명부, 안중근의사 변호인 비용 명부 등을 확인해보면 조국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과 강한 독립의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1905년 8월 8일, 우리나라의 마지막 공식 이민이 끝나는 날까지 총 7,415명에 달하는 우리 선조들은 총 64회에 걸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향했던 한국의 이민자들. 그들은 120여년 된 한국 이민역사의 모태이자 숱한 역경을 딛고 미국에 정착한 한인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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