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업계는 지금 IP 전쟁중 … "정체기 성장통, 협의체 만들어 소통 시작해야"
특정 게임 고유 아이덴티티 인정 '애매', 분쟁 지속 원인
게임 산업 이미 성장 극대화 … ‘뉴페이스’ 등장 어려워
“업계 간 ‘소통’이 침체기 타개하는 ‘게임 체인저’ 되길”
[서울경제TV=김서현 인턴기자] 게임업계에 지식재산권(IP) 분쟁이 유행병처럼 확산하고 있다. 게임 대표 기업인 3N(▲넥슨 ▲엔씨소프트 ▲넷마블)부터 신생기업까지 IP 분쟁에 폭넓게 얽혀 있다. ‘게임 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숙기에 다가가며 발생한 필연적인 단계'라는 게 현재 업계의 진단이다. 정부는 명확한 표절 기준을 세워 불필요한 소모전을 미연에 방지하자고 제안하지만 정작 업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관계자들은 규제의 부재보다 업계 간 ‘불통’이 문제를 심화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업계 간 소통을 통한 자정작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표절vs관습’ 기싸움 팽팽, 악수할 날은 멀어 보여
게임업계 IP 분쟁은 최근 1년간 특히 급증했다. 현재 소송 중인 게임사만 엔씨, 넥슨, 크래프톤, 카카오게임즈, 웹젠, 레드랩게임즈, 엑스엘게임즈, 아이언메이스 등 8곳이다.
‘자사의 고유 IP를 자의적으로 베낀 명백한 표절’이라는 피해 주장 측 입장과, ‘통상적인 게임 시스템 범위 안에서 구현했다’는 반대 입장. 두 입장의 충돌이 곧 게임 IP 분쟁의 핵심 쟁점이다. 가장 최근 사례인 엔씨소프트와 카카오게임즈의 싸움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엔씨는 지난 2월 22일, 서울중앙지법에 카카오게임즈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카카오게임즈의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롬(ROM)’에 대한 문제 제기다. 지난 2021년 엔씨에서 출시한 MMORPG 게임 ‘리니지W’의 종합적인 시스템을 모두 표절했다고 봤다. 카카오게임즈는 롬이 해당 장르의 일반적인 디자인 범주 안에 있다며 맞섰다.
신경전은 빠른 시일 안에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임 산업 특성상 다른 분야에 비해 법적 분쟁의 해결이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나 음악 등은 전체적인 진행 양상이 한눈에 보이기에 표절 여부를 판단하기가 비교적 쉽다. 반면 게임은 디자인·콘텐츠·UI 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게임사 저작권 분쟁을 수임했던 변호사 A씨는 “게임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비교하는 걸 설득하는 부분이 어렵다”며 “일부만 베낀다고 해서 표절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종합·적극적인 표절 여부 판단이 필요하지만, 그러기에는 판사들이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점도 발목을 잡는다고도 덧붙였다.
이렇듯 저작권법 위반 판결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엔 약한 수준에서 게임 간 유사성을 인정해 주는 추세다. A씨는 “저작권법 대신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판결을 통해, 넓은 범위에서 표절이라고 인정해주는 판결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악의적 표절은 아니지만 의혹을 받는 기업 역시 무고를 입증하기가 어려워졌다. 게임 장르 고유의 특성과 특정 게임의 아이덴티티 사이 모호하게 중첩되는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의혹을 받는 게임은 출시된 그 시기에 ‘일반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게임 디자인임을 입증해야 한다. 이를 통계나 사례를 통해 보여야 하는데, 일반적이라는 것에 대한 기준이 없다 보니 이마저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렇듯 모두에게 지난한 소송 과정이지만 IP 분쟁은 앞으로도 확전될 것으로 보인다. 피해를 주장하는 게임사들이 법원의 판례에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라도 재판부에서 저작권을 조금씩 인정해주기 시작할 때 도덕적인 선례를 남겨, 게임 생태계의 악습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게임 IP 대전, 최근 격화됐지만 … 사실 이미 예견된 수순?
게임 업계엔 ‘올 것이 왔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산업 초반엔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졌지만, 성숙하는 과정에서 창의성에 한계가 오는 게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현재 국내 게임 산업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상황이다. 국내 게임 산업은 2014년부터 간 성장세를 유지해 왔다. 지난 2022년에는 22조 2,149억원을 달성하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렇듯 신선한 IP가 나오기 어려워지면서 '고의적인 베끼기’도 발생한다. 게임사 관계자는 “새로운 IP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인력과 기간이 필요한데, 겨우 겨우 하나를 완성하더라도 성공이 잘 보장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작은 회사일수록 시간과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며 "성공한 전적이 있는 유명 IP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때마침 나타난 인공지능(AI)도 IP 모방 현상을 가속화했다. 게임사들은 게임 개발에 AI를 활용하며 직원을 대폭 감축했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유출된 인재들이 회사 밖에서 또 다른 게임을 만들다 보니 고의적이든 아니든 기존과 유사한 게임들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또 AI를 통해 비전문가들도 쉽게 게임을 만들게 되면서 많은 작품들이 쏟아졌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양질의 게임이 아닌, 양산형 게임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러다 지난 해 처음으로 한국 게임산업 매출이 침체기에 들어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3년 한국 게임산업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9% 감소한 19조 7900억원을 형성할 전망이라며, 집계 사상 최초로 역성장을 기록했을 것이라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앞서 언급한 게임 소재 고갈과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재택 시간 감소, 대안적 엔터테인먼트들의 대두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 게임사는 자사의 대표 IP에 집착하게 됐다. 새로운 성장원을 기대하기 힘들어지면서 일명 ‘수익 보증수표’인 각 게임사의 핵심 IP를 지키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한 관계자는 “이전에는 기업 이미지나 소송 비용 등을 고려해 표절이 명백해도 법적인 시비를 잘 가리지 않았다”며 “이젠 산업 자체가 발전 가능성이 적어지니, 캐시카우인 주요 IP를 엄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최근 기존의 게임 IP로 드라마·굿즈·웹툰 등 2차 창작물을 활발히 만들어내는 방법으로도 ‘IP 사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김 교수는 “게임사들이 표절 분쟁 소식을 연일 보도하는 것도 IP를 지키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고 분석했다.
게임업계가 성장하면서 법조계와 가까워진 상황도 IP 대전 시점과 맞물렸다. 기업들이 커지고 경영진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법률전문가들이 경영에 많이 참여하게 되자,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분쟁 과정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기업들의 규모가 커진 것도 이를 뒷받침했다. 실제로 김앤장을 비롯한 10대 대형 로펌들도 모두 게임 전담팀을 꾸려 수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 소통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성장도 있다”
업계에선 자연스러운 자정 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한 관계자는 “지금 상황의 심각성은 게임사들이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며 "표절 시비에 대한 위험부담이 커지고 있는 만큼, 새로운 창작윤리를 내부에서 만들어가는 반성의 계기가 되지 않겠나”라고 전망했다.
정부기관이나 각종 매체에선 게임 저작권 표절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확립하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 22일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 보고서'를 통해 게임 저작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이광욱 화우 게임센터 변호사는 “방법론적으로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안별로 조건이 크게 달라 만들어봤자 별로 실효성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임 업계 관계자도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범위가 넓고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만들기조차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크다. 규제가 많아지면 오히려 또 다른 잡음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견해다. 창작 환경 위축에 대한 걱정도 배제할 수 없다. 관계자들은 “구속성이 있는 가이드라인이라면 정부나 공공기관 인사들이 만들게 될 것"이라며 “게임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만든 규제는 되레 실무에 방해가 될 확률이 크다”고 우려를 표했다.
다만 업계 내 원활한 소통·합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발견됐다. 한 관계자는 “게임 업계가 실효성 있는 협의체도 없고 타 산업에 비해 접촉할 기회도 적다”면서, “업계 종사자들이 개별적인 업무 진행을 선호하고, 타 그룹과의 대화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이런 불통 구조는 갈등의 위험을 키운다. 김 교수는 “게임 업계의 상호 협조로 선순환이 이뤄지면 분쟁이 덜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표절에 대한 케이스를 함께 연구하고, 논쟁적 사안에서 선제적으로 합의를 이뤄 분쟁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작은 기업일수록 게임 개발 중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정보력이 부족해 타 기업과의 유사도 검증도 어렵다. 학계에서는 “주무부처에서 예산과 기획을 어느 정도 맡아 기업 간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저작권 교육에 힘써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동시에 이런 소통을 통해 게임 산업의 반등을 꾀할 수도 있다. 현재 게임 업계는 해외 게임 강세와 불법 게임들의 안방 침투로 고전 중이다. 게임 글로벌화에 대항할 혁신적인 IP 개발과 불법 게임 시장 근절은 개별 기업만의 차원에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몇 년에 걸쳐 증명됐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의 소모전보다 시급한 건 산업 체질 개선을 통한 외부 위협 대응”라고 입을 모은다. 이제는 성장의 발목을 잡는 뇌관을 제거하고, 힘을 합쳐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견할 때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bodo_celeb@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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