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人4色 | 전승훈] 변하지 않는 ‘사람의 무늬’를 찾아서

전국 입력 2025-12-27 21:40:55 수정 2025-12-27 21:40:55 이경선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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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내일이라고 해서 오늘과 극적으로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제와 오늘, 올해와 내년을 나눈다. 나눌 수 있기에 떠나보낼 수 있고, 또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그리고 매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어디쯤에서 삶을 나누어 돌아보고, 어디부터 새로이 나아가야 하는지 가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인공지능(AI)의 비약적인 발전을 빼놓기 어렵다.

미국의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1948~)은 2005년에 발간한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기술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지점,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를 예측한 바 있다. 그로부터 불과 20년 남짓 지난 지금, “AI가 인간의 무수한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는 소식은 기후변화로 인한 폭우 예보처럼 일상적인 뉴스가 되었다.

알고리즘은 나의 취향을 나보다 더 정확히 짚어내며 욕망을 들춰 보이고, 짧게 즐기려 눌렀던 숏폼 영상은 오히려 우리를 화면 안에 더 오래 붙들어 둔다. 스스로 시간을 나누어 “이쯤에서 멈추자”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마저 빼앗기는 순간이 잦아지고 있다. 떠나보낼 때와 붙잡을 때, 마감과 시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이 2000년 출간한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에서 말했듯, 지금은 절정의 불안정성과 유동성이 지배하는 시대다.

개인에게 끊임없이 강요되던 ‘경쟁’과 ‘적응’은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 사람과 AI 사이로까지 확장되었다. 필자 역시 한때는 쏟아지는 AI 관련 뉴스를 부지런히 따라잡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만 지나도 새로운 정보에 밀려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순식간에 철기시대를 맞이한 신석기인처럼, 시대는 저만치 달려가는데 나만 쭈그려 앉아 애먼 돌멩이만 갈고 있는듯한 감각이 들 때가 있다.

최근 출간된 '트렌드 코리아 2026'이 다루는 핵심 배경 역시 AI 대전환 시대다. 그 가운데 몇 가지 개념을 짚어보면, 먼저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가 있다. AI가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최종 판단과 책임에는 인간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원칙이다. 결국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판단이야말로 AI 시대의 궁극적인 경쟁력이자, AI 활용의 최종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개념은 ‘켄타우로스적 인간’이다. AI의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하체’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인간만이 지닌 감성과 지혜라는 ‘상체’를 잃지 않는 존재상이다. AI를 맹목적으로 경계하거나 무조건 숭배하는 양극단을 넘어, 인간과 AI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제안이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키워드가 바로 ‘근본니즘’이다. AI가 쉽게 만들어내거나 위조할 수 없는, 진짜 ‘근본적인 가치’를 향한 열망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필자는 이 세 가지 가운데, 특히 ‘근본니즘’에 눈길이 간다. 얼핏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떠올리게 만드는 표현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근본니즘은 특정 종교에 대한 맹신이나 배타성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이제 AI는 몇 초 만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낸다.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실체 없는 환영, 즉 일종의 ‘환각(Hallucination)’에 가깝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우리는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기꺼이 소비(消費)는 하지만, 선뜻 소유(所有)의 차원으로 들이지는 못한다. 그 결과물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유동적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니즘이란 “도대체 변하지 않는 진짜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가려는, 인간의 절박한 존재론적 회귀 본능이라 할 수 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은 매끈한 디지털 화면이 아닌 거친 질감, 가공된 데이터가 아닌 땀 냄새 배어 있는 서사, 그리고 시간의 시련을 통과해 살아남은 ‘오리지널리티’를 갈망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쉽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해답은 전북특별자치도의 문화예술 속에 이미 있다”라고. 한국 문화의 가장 깊은 뿌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땅에 박혀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전북의 문화예술을 단순히 ‘전통의 보고(寶庫)’로만 규정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근본’은 유형·무형유산으로서의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지금도 꿈틀거리는 ‘끈질긴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본이 지닌 흉내 낼 수 없는 권위, 즉 ‘아우라(Aura)’의 붕괴를 일찌감치 예견했다. 오늘날의 AI는 마치 그 예견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전통음악의 음계를 완벽하게 학습해 새로운 곡을 만들어내고, 가상현실 속에서 실제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전통건축물을 손쉽게 구현해낸다.

시각적 완성도만 놓고 보자면, AI가 복원한 디지털 문화유산이 실물을 능가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매끈한 화면 앞에서 좀처럼 전율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시간’이 삭제되어 있고, 그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의 흔적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인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기술(技術)이란, 존재를 ‘총체적으로 몰아세우는(Ge-stell)’ 힘으로 보았다. 기술은 대상을 효율성의 관점에서만 보도록 강요하고, 마침내 존재를 은폐(隱蔽)하고 상실(喪失)에 이르게 한다. 기술의 시선에서 라인강은 그저 수력발전을 위한 자원일 뿐이다.

반대로 문화와 예술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탈은폐(脫隱蔽)의 과정에 가깝다. 전북의 문화예술이 지향해야 할 ‘근본’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AI가 그리는 세상이 0과 1로 짜인 빈틈없는 논리의 세계라면, 전북이 보여줘야 할 세상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고뇌, 그리고 삶의 비릿한 땀방울이 스며 있는 실존의 세계여야 한다.

한옥의 처마가 아름다운 까닭은 단지 일정한 비례와 비율을 충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내리는 햇빛과 비, 바람을 막아주고자 하는 배려, 그리고 자연환경과도 조화를 이루려 했던 마음 씀씀이가 함께 배어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 또한, 완벽한 고증이나 여덟아홉 시간에 이르는 공연 시간의 달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리꾼이 토해내는 거친 숨, 그 이면에서 울리고 있는 민중의 한(恨)과 해학이 핏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본니즘은 ‘무엇을(What) 보여주느냐’에 앞서, 그 안에 ‘누가(Who) 살고 있으며’, ‘어떤 마음(Why)을 담았는가’를 묻는 치열한 인문학적 고민이어야 한다.

다시 전북의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보자. 일제강점기 건물 가운데 상당수는 본래 쌀을 수탈하던 양곡 창고이거나, 일본인 지주의 저택이었다. AI 시대의 시각에서 보면, 이 낡고 비효율적인 공간은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정리해 버려야 마땅한, 데이터상의 유휴 공간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이곳을 쉽게 허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건물들을 단지 세련된 갤러리나 깔끔한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데 그친 경우 또한 적지 않다.

근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차가운 벽에 기대어 고된 잠을 청했을 조선인 노동자의 숨결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 속에서도 더 선명하게 들렸을 굶주린 배의 소리를 함께 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을 둘러싼 ‘결핍’과 ‘상처’의 서사를 함께 말해야 한다. AI는 데이터의 패턴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쌀 한 가마니를 빼앗기지 않으려던 농민의 절규나, 굶주림 속에서도 끝내 차오르길 주저하지 않던 희망까지는 생성(生成)해 내지 못한다.

익산의 황등비빔밥과 보석 역시 마찬가지다. 황등비빔밥은 국가유산진흥원에서도 전주·진주와 더불어 전국 3대 비빔밥으로 꼽고 있지만, 전주·진주비빔밥과 달리 역사도 짧고, 외양이 특별히 고급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미리 비벼서 나온다는 점도 다른 두 도시와 다른 특징이다. 왜 그럴까. 애초에 이 음식은 새벽부터 해 질 무렵까지 돌과 씨름해야 했던 석공들을 위한 밥상이었기 때문이다.

바쁜 그들이 식사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반찬을 한데 넣어 비벼 먹던 습관에서 비빔밥이 탄생했고, 그조차 힘겨운 이들을 위해 아예 미리 비벼서 내놓게 된 것이다. 황등비빔밥은 단지 미식(美食) 관광의 콘텐츠가 아니다.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던 석공들의 애환(哀歡)이 함께 비벼진 음식이다.

보석도 그렇다. 익산은 잘 알려진 것처럼 보석의 원석(原石)이 채굴되는 도시가 아니다. 그럼에도 ‘보석의 도시’라 불리는 이유는, 귀금속보석공업단지에서 세공 기술을 갈고닦아 온 장인(匠人)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를 갈아낼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삶은 그보다 단단하게 지켜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보석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었다.

결국엔 다시 ‘사람’이다.

불안정성과 유동성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의 ‘오리지널리티’, 그리고 그 본연의 가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힘. 이것이야말로 전북 문화가 지향해야 할 근본니즘의 방향일 것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전북의 문화예술은 ‘데이터(Data)’에서 ‘서사(Narrative)’로, ‘기술(Tech)’에서 ‘영혼(Soul)’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술 시대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변하지 않는 근본, 곧 ‘인본주의(人本主義)’다.

다시 2026년의 트렌드로 예측된 근본니즘을 떠올려본다. 바람이 거셀수록 나무는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AI라는 거대한 문명의 파도가 우리 삶을 덮쳐올수록, 우리는 더욱 깊숙이 우리 내면의 뿌리, 다시 말해 ‘사람’에게로 파고들어야 한다. 전북은 그럴 힘을 가진 땅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외침과 수탈, 산업화의 소외 속에서도 묵묵히 밥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서로를 보듬어온 ‘사람의 무늬’가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 해, 전북 문화예술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은 이렇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가장 첨단의 시기에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기술의 차가운 금속성 위로 인간의 뜨거운 체온을 덧입히는 것.

기계가 인간을 흉내 내는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랑과 연대, 그리고 흉내 낼 수도, 복제할 수도 없는 성찰의 가치를 노래하는 것. 그것이 전북이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진정한 의미의 ‘근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넘어서는 사람의 위대함이다. 전북의 문화예술은 언제나 그 위대함을 증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현장’이어야 한다.

▲ 전승훈 원광대학교 글로벌 K-컬처 사업단 기획행정실장
·문화통신사협동조합 전략기획실장
·익산시문화도시 지원센터 사무국장
·원광대학교 HK+지역인문학센터 행정실장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심의위원
·익산시민역사기록관 운영위원
·부안군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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