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의 정치워치] 한일관계 54년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
현재 한일관계는 역대 최악이다. 적대적 갈등관계라 할 수 있다. 양국 지도자와 국민들도 서로를 혐오하고 적대시한다. 반일감정, 반한감정이 들끓고 상호
간 적대심이 커질수록 외교적 자율성의 폭은 좁아질 수 밖에 없다. 서로
협력하여 이익을 공유할 수 있지만, 유권자를 의식해 협력의 모양새를 취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한일관계가 나날이 최악의 상황을 낳고 있지만, 국교 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를 살펴보면
항상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관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한일관계는
적대적 갈등관계,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는 양국 지도자 간
전략적 제휴의 강화 속 국민간 갈등관계, 노태우/김영삼
정권에서는 보수정치인들간의 협력 속 양국 국민들도 원만한 상호이해를 모색하기 시작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전반기에는 상호이해의 분위기가 두드러지지만,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 한일관계가 갈등국면에
접어든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한일관계가 전면적 협력관계로 가는가 싶더니, 이명박 정권 말기에는 급속하게 관계가 악화되었고 박근혜-아베 정권에서는 적대적 갈등관계가 다시 등장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반일 노선을 전개했다. 한일회담이 시작은 되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허송세월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1961~1979)은 반공체제를 강화하면서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반일
노선에서 국교정상화 추진으로의 방향전환은 미국의 압력, 원조축소에 따른 경제개발자금 확보의 필요성이
생겨났다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빈곤 탈출,
북한의 위협에 독자적 대응을 목표로 하고, 이를 위한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치지도자의 결단으로 이뤄졌다. 한국에서는 극렬한 데모가 있었고, 일본 역시 국민의 환호 속에 한일
관계 정상화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감소에 대응할 전략을 요구
받고 있었다. 한일 간 국교정상화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반공전선의 강화로 이어지고, 한일간의 전략적 제휴가 미국을 경유한 사실상의 동맹 혹은 유사동맹으로 보여질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제휴 속에서 한일각료간담회, 한일협력위원회, 한일의원연맹, 한일친선협회와 같은 협력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박정희 정권은 닉슨 독트린으로 나타난 미국의
아시아 관여 축소, 미중 접근, 중일 국교정상화에 대응해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중화학공업화에 전념하는데, 이는 국민의 정치참가를 배제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기본적 외교관계,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국민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
전두환 정권 들어서도 박정희 정권 시기의
한일관계 기본구조는 이어진다. 경제협력에 더해 안보협력이 연동하는 형태로 전두환-나카소네의 협력관계는 강화되고, 1983년 나카소네 방한, 1984년 전두환 일본 공식 방문이 이루어진다. 김영삼 문민정부출범 이후, 북방외교정책으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던 북한이 핵개발에 나서자 한미일 전략적 제휴는 더 강화된다.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일본에서의 한국 이미지가 향상되고, 한국에
대한 투자와 관광객이 늘어나게 된다. 한국에서도 1987년부터
일반국민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일본여행자 비율도 높아지게 된다.
한일관계에 있어서 일반 국민의 의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라 할
수 있다. 양국 정상이 문화를 개방하고 민간교류의 확대를 약속한 것이다. 이 때부터 문화교류를 통해 상호간 친밀감이 높아지게 된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대북포용정책(햇볕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두고
한일 간 견해의 차이가 있긴 했으나 한일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2005년
시마네 현에서 다케시마 편입 100주년 기념해 다케시마의 날 제정해 영토분쟁이 벌어졌고,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외교전쟁도 불사하겠다며 강경대응의 자세를 취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경색되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 일본 민주당 정권은, 아시아외교를 중시하면서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금지, 역사인식 발언을 관리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2010년 칸 나오토의 총리 담화는 한국에 대한 전략적 친근감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자세이기도 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이며, 포괄적이며 전면적인 협력관계의 구축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2011년
후반부터 위안부 문제가 재등장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일본에서 재판을 벌이는데 패소하고, 한국 헌법재판소에 소를 제기해 한국정부의 외교노력이 부작위라는 판단을 얻게 된다. 이 때문에 2011년 12월 쿄토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위안부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노다 총리가 이를 거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항의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하게 된다.
2012년 9월에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아베신조는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독도 문제에 대해 보수우파의 인식을 드러내고,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천황에 대한 사죄요구 등이 일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하락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역시 한일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한국 여론은 합의에 대한 비판 일색이었고, 일본 여론은 한국이 합의를
해 놓고 말을 바꾼다며 비난했다. 짧았던 전면적인 협력관계에서 적대적 갈등관계로의 전환은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1965
김동환 박사 / kdhwan8070@naver.com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정책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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