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에 거주하는 80대 A씨는 최근 치매 진단을 받은 배우자를 위한 재산 관리 방법을 알아보다 은행에서 ‘치매안심신탁’과 요양 시설 정보까지 안내받았다. 예전 같으면 공공기관이나 복지센터를 먼저 찾았겠지만, 지금은 금융사 상담 창구가 그의 첫 선택지가 됐다. 단순한 입출금 계좌를 넘어, 노후 생활 전반을 설계하는 파트너로 금융회사를 찾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17일 금융계에 따르면, 2025년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20%가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고령 인구의 비중이 7%를 넘는 고령화사회(2000년), 14%를 넘는 고령사회(2017년)를 거쳐 이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에 따라 최근 국내 4대 금융그룹은 고령층 맞춤 전략을 발빠르게 선보이고 있다.
◇ 이제 시니어는 '배려' 아닌 '주력 고객'
[사진=통계청]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60세 이상 고령층의 가구 평균 순자산 보유액은 약 5억 1900만원으로, 전체 가계 자산에서 약 39.2%를 보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는 2025년에는 고령층의 자산 비중이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고령층의 자산 규모와 복합적인 금융 니즈는 이제 단순한 관심을 넘어, 금융사 입장에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시장이 됐다. 이들은 앞으로 20~30년간 장기적으로 금융사의 미래 수익을 좌우할, 금융권 내에서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핵심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 4대 금융, '노후 동반자' 전략 경쟁
먼저 신한금융은 다가오는 3분기에 ‘시니어 전문 브랜드’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지난 10일 밝혔다. 자산관리솔루션그룹의 주도로 시행되며, 아직까지는 사업 방향성을 구상 중인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은 각 계열사들이 시니어 사업을 개별적으로 운영해왔지만, ‘시니어 금융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전략을 마련한 것이다. 신한금융은 자사의 최대 강점인 퇴직연금을 중심으로 한 자산관리 서비스와 더불어, 고객의 생애주기에 맞춘 신탁 상품 중심으로 서비스를 내놓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012년 금융그룹 중 가장 먼저 시니어 브랜드를 선보인 KB금융은 계열사별로 사업 기반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자사의 시니어 특화 브랜드 ‘KB골든라이프’를 중심으로, 각 계열사의 고객·상품·서비스 관리 역량을 통합해 사업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다. 향후 1~2개월 내로 ‘시니어 전담 컨설팅센터’ 7곳을 추가로 신설해 총 12곳까지 늘리고, 탄탄한 비금융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건강관리·요양 상담·노후 설계·자산 승계까지 모두 관리해주는 ‘시니어 토탈케어 솔루션’을 선보일 전망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하나금융은 지난해 시니어 브랜드 ‘하나 더 넥스트’를 선보이며 시장 선점에 나선 바 있다. 올해는 계열사별로 사업 분야를 구체화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에는 시니어 전문 자회사 ‘하나 더 넥스트 라이프케어’를 설립함으로써 요양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또, 지난 1일에는 WM혁신본부 산하에 고액자산가 대상의 자산관리 서비스와 영업 전략을 수립하는 조직 '하나더넥스트실’을 신설했다. 하나금융은 고객이 자산관리와 보험, 요양 서비스 가입까지 한 번의 접근만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우리금융은 지난 1일, 50대 이상 시니어 고객 전용 브랜드 ‘우리 원더라이프’를 출시했다. ‘인생의 후반전을 빛나고 경이롭게’라는 슬로건과 함께, 시니어 맞춤형 자산관리·건강·여가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에 더불어 우리WON뱅킹 앱을 통해 비대면 '시니어 통합서비스'도 선보였다. 해당 서비스는 앱 내 흩어져 있던 시니어 전용 금융상품과 콘텐츠를 한 화면에 모아, 고객들은 비금융 정보와 각종 상담도 버튼 하나로 편리하게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지난해 조성한 시니어 금융교육 ‘우리 어르신 IT행복 배움교실’을 올해는 5개의 배움터를 추가 운영해, 어르신들에게 모바일뱅크, 금융사기 예방, 챗GPT 활용법 등 교육을 진행한다.
◇ 단순 금융 넘은 '토탈 라이프케어'
4대 금융의 시니어 전략은 이제 단순한 ‘자산 관리’에서 벗어나, 주거·건강·요양까지 아우르는 ‘토탈 라이프케어’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연금, 신탁 등 전통적인 자산 관리뿐 아니라 치매, 고독사, 장기요양 등 고령층의 실생활 문제를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고객의 ‘건강’과 ‘복지’까지 금융이 개입하는 방식이 확대되고 있다. ‘치매 전용 신탁’, ‘치매 안심 보험’, ‘장기요양 연계 서비스’, ‘노후주택 연계형 상품’ 등은 자산 보호와 동시에 삶의 질까지 고려한 복합 설계다.
이 같은 변화는 금융권의 디지털 전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고령층의 디지털 소외를 줄이기 위해 AI 상담 서비스, 고령 친화적 앱 디자인, 전용 콜센터 운영이 확대되고 있으며, 고령층 고객만을 위한 ‘생활밀착형 금융 플랫폼’ 구축도 속도를 내고 있다.
다시 말해, 최근 금융의 역할은 단순 자산 증식보다는 삶의 불안 요소를 줄이고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셈이다. 특히 치매, 사망, 고립 등의 리스크는 재산 분쟁이나 가족 갈등으로까지 번질 수 있어, 금융사의 선제적 개입이 고령층 고객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 고객의 만족도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시니어는 이제 금융사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수익 고객군이 됐다. 자산 규모뿐 아니라 장기 거래 가능성과 데이터 기반 서비스 확대 측면에서 전략적 가치가 크다. 단순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동반 성장’의 대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
앞으로는 고객의 생애주기(Lifecycle)를 기준으로 금융 서비스를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이 금융사의 미래 경쟁력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초고령사회 속에서, 금융은 이제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다. /jiyo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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