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메이드칼럼] 얼죽아, 김밥천국, 그리고 '서울메이드'
[편집자주 :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문화·산업적 가치를 조명하는 '서울메이드 칼럼'을 연재합니다. 학계, 산업계 등 각계 전문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서울메이드'(SEOUL MADE)는 서울의 문화, 제조 등의 융복합적 가치를 아우르는 통합 브랜드입니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문정훈 교수. [일러스트=태균]
애써 미래만 보려 하면 오히려 미래는 모습을 감춘다. 대신 현재의 변화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지금 서울 식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전 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다양한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다양한 요소에 서울의 전통과 동시대 트렌드까지 융합되어 ‘서울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곰탕’이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평양냉면’은 사실상 ‘서울냉면’이라고 볼 수 있다. ‘돼지곰탕’은 경남 밀양에서 많이 먹는 ‘돼지국밥’이 서울로 올라와 ‘옥동식’이나 ‘광화문국밥’ 같은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깔끔하고 세련된 맛의 서울식 곰탕으로 변화한 것이다.
김치도 서울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예 중 하나다. 내가 운영하는 서울대학교 푸드비즈랩이 ‘오픈 서베이’와 함께 조사한 ‘한국인의 아침 식사’에 대한 결과는 여전히 우리가 아침으로 빵이나 시리얼 대신 한식을 많이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간편식’이라는 트렌드가 더해져 ‘내게 익숙한 한식을 간편하게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간편식을 먹을 때 옆에 놓을 반찬 한 가지는 자연스럽게 김치로 귀결된다. 그래서 오히려 다양한 김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김장은 ‘세련된 서울 여성들이 주말에 즐기는 힙한 놀이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 명이 절인 배추를 구매한 후 자기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김장을 하고 김치를 나눠 가고, 비용도 인원 수대로 나누는 형태가 많다. 앞으로 김치가 어떤 맛, 내용, 형태로 바뀌어나갈지 나도 정말 궁금하다.
서울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지어 먹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외식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외식에서도 ‘서울 스타일’이 두드러진다. 지금 우리가 서울에서 먹고 있는 고구마 무스가 올라간 피자 등은 완전히 서울화된 피자다. 정통 햄버거를 고집하는 버거 브랜드는 고전하고 있고, 이것을 한국화한 ‘맘스터치’ 같은 브랜드는 크게 성공했다. ‘버거킹’ 같은 브랜드도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원하는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메뉴 개발을 멈추지 않는다. 치킨 역시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이렇게 외국 음식이 한국 사람, 서울 사람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어떤 도시에도 없는 새로운 음식과 맛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외식 분야에서의 서울 스타일이다. 지금은 주춤하지만 한때 한식 뷔페가 유행했던 것 역시 서울의 외식 산업이 우리의 맛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런 흐름을 봤을 때 앞으로 서울의 외식 산업에서 ‘한상차림’이 부상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집에서 간편식을 먹는 것은 한상차림으로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 가사 역할이 너무 과중해 못 차려 먹기 때문이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코스로 정찬을 즐기듯 가까운 미래에는 집이 아니라 외식을 통해 한식의 한상차림을 즐기게 되지 않을까 예상한다.
◆ 해외 푸드문화도 국내 들어오면 한국화
한국인의 아침 식사를 분석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정말 커피를 많이 마시고 있으며 커피 역시 한국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메리카노는 미국에서 마시기 시작한 커피 문화지만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는 정말 한국적인 현상이다. 거기에 다양한 재료를 첨가해 새로운 아이스커피 메뉴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서울 스타일’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커피 역시 이제는 한식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서울의 미래 식문화를 이야기하자면 ‘푸드테크’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푸드테크를 가장 잘 적용하고 있는 곳이 뜻밖에도 ‘김밥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김밥천국에서는 누구나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메뉴들을 1.5~2명의 주방 직원과 1명 정도의 홀 직원이 소화한다. 그것은 이 브랜드에 ‘센트럴 키친’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반조리된 음식을 각 체인점에서 받아 데워서 내놓는 형태로 운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푸드테크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센트럴 키친’은 사실 식품 제조 공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이미 서울의 다이닝업계에서 외식과 식품제조업의 경계는 사라졌다. 여기에 식품 소매 유통업(식품 배달 브랜드)까지 더해져 이 세 분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또 한 가지 현상은 동네 식당이나 카페를 가장 위협하는 대체재가 ‘편의점’이라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밥 먹으러 편의점 간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여기서 공유 주방 시스템이 성장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위쿡’을 꼽을 수 있다.
◆ 레시피, 아이디어가 '푸드 비즈니스' 성패 결정할 것
예전에는 식품제조업으로 창업하고자 할 때 공장 지을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만 이제 관련 규제가 풀리면서 시대가 달라졌다. 위쿡 같은 브랜드는 ‘공장은 우리가 지어놓았으니 당신의 레시피만 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할머니가 가르쳐준 맛있는 식혜 레시피를 갖고 있다면 위쿡에 가서 제조하고 유통까지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서울에서 식품제조업을 하고자 할 때 자본이나 공장의 유무보다는 좋은 레시피와 아이디어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흔히 ‘공유 주방’ 하면 같이 모여 밥하고, 밥 먹는 공간만을 떠올리는데 사실 ‘공유 식품 공장’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비용 부담을 줄이면서 자기 아이디어와 레시피를 갖고 소량 생산, 유통한 후 시장 테스트까지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둘 수도 있다. 요즘 ‘오프라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식품을 제조해 온라인 마켓에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외식업자가 늘고 있다. 지금까지 식품 제조업자들에게 밀렸던 외식업자들의 반격이 공유 주방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유 주방이라는 시스템 아래 투자, 위생, 인허가 같은 큰 장애물들이 사라진 덕분이다.
지금 서울의 식문화를 이끄는 트렌드 하나는 바로 ‘채식’이다. 10여 년 전부터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비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은 샐러드 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채식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건강과 동물 복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 중에는 반려견, 반려묘를 키우는 20대 초중반 여성도 많다. 동물의 권리와 복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채식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진 것이다. 그들이 ‘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육식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비중도 눈에 띌 정도로 늘고 있다.
식품이나 음식에서의 혁신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익숙함 내에서의 변화다. 때문에 점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진다. ‘배양육’이나 ‘곤충식품’이 제품으로 출시된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익숙하게 섭취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분명한 것은 음식의 미래를 향한 꾸준한 변화 안에서 서울의 식문화와 식품 산업은 ‘사회적인 행동’, ‘함께 즐기는 문화’, ‘지속 가능성’을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칼럼은 서울산업진흥원(SBA. 대표 장영승)이 발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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